최근에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작품, 이광수의 ‘흙’을 시 읽었다. 고교시절 수업시간에 몰래 읽다가 혼도 많이 났으니 족히 몇 십 년 만의 재독(再讀)인 셈이다.

다시금 읽어도 당시에 성행한 농촌 계몽운동에서 취재된 인도주의적 경향과 ‘살여울’이라는 무지와 빈궁과 핍박으로 억눌려 있는 농촌, 주인공 허 숭의 희생적인 노력과 꿈 등이 아직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비록 춘원 이광수가 한국 문학사에서 때로는 신화적 거성으로 받들어지기도 하고, 혹은 반민족적 이단자요, 통속 소설가라고 지탄받기도 하지만 한국 근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문학의 산맥’이 아닐까 싶다.

만일 이광수가 문학 작품만을 창작한 순수한 작가이거나, 변절하지 않은 지사였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단순했을 것이다. 또 논란도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아울러 1897년 추석에서 시작되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고(故) 박경리의 ‘토지(土地)’도 영성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가히 구한말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굴곡의 역사를 무대로 한 작품이다. 아니 광활한 한국 근대사의 복원물이 아닐까 싶다.

‘평사리’에서 시작해서 경성, 만주, 간도, 연해주, 일본을 넘나드는 광활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복원되는 토지는 그러하다보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또한 다양하다.

그렇다. 토지는 시대적 흐름을 따라 역사적 상황을 순서대로 보여주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일상 경험을 통해, 기억과 회상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면 토지의 참다운 가치는 무엇일까? 아마도 큰 줄기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 소홀해지기 쉬운 부분을 복원한 이유일 게다.

통상적으로 대하소설은 10권 내외의 분량이다. 그럼에도 고(故) 박경리의 토지는 갑절이나 많은 21권에 이른다.

고인이 25년에 걸쳐 써내려간 대작이니 그럴 만도 하다. 새삼 기억해보니 오래 전에 토지 21권을 모두 읽는데 서너 달은 걸린 것 같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에 빠져 산 셈이다. 하지만 한번 읽었다고 해서 토지의 참맛을 제대로 느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25년 삶이 모두 녹아 있는 토지의 맛은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529년, 중종의 정국 운영이 난맥상을 빚자 대사간 원계채(元繼蔡) 등이 올린 상소문도 물씬 느껴진다. 요지는 이렇다.

‘나랏일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상황인데도 임금이 끝내 깨닫지 못하면 큰 근심을 자초한다. 임금이 통치의 근본은 잊은 채 자질구레한 일이나 살피고, 번잡한 형식과 세세한 절목은 따지면서 큰 기강을 잡는 일에 산만하면 법령이 헤이해지고 질서가 비속해진다. 밝은 선비가 바른 말로 진언해도 듣지 않다가 큰 일이 닥쳐서야 비로소 후회한다…’

여기에서 토붕와해는 ‘흙, 즉 지반이 무너져서 기와가 다 깨진다’는 뜻이다. 지반이 무너지거나 구들장이 꺼지면, 지붕마저 내려앉아 기왓장이 산산조각 난다. 지반이 탄탄한데 지붕이 주저앉는 경우는 드물다.

근본과 기강이 서고 백성이 제자리를 잡고 있다면 와해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바닥이 통째로 주저앉는 토붕의 경우는 손쓸 방법이 없다.

집이 무너져 가는데 문패나 바꿔 다는 미봉책이나, 위기의 본질을 외면한 채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고식지계(姑息之計)로는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끝으로 흙에 대한 여러 잠언(箴言)들이 생각난다. 같이 한번 읊조리면서 엄동설한이지만 ‘흙’과 ‘토지’를 생각하며 이것이 던져주는 본질적인 의미를 헤아려봄은 어떨까 싶다.

… 세상에 흙같이 만만하고 천한 놈은 없다. 누구나 밟고 지나가니 이놈 저놈에게 짓밟혀 딱딱하게 굳어졌다가도 비만 오면 녹녹하게 녹아나는 것이 부드럽고 정겨워서 이렇게 좋을 수 없다.

… 흙은 생명의 태반이고, 하늘을 품는 자궁(子宮)이기도 하다. 뭇 생명들을 낳고 기르는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은 죽어 흙이 된다.

… 흙은 세상을 품는다. 밤과 낮을 품고, 씨앗도 우물도 사람까지… 흙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흙이다. … 흙은 겸손하다. 가장 낮은 곳에 있다. 흙에게 순종을 배운다. 흙은 사람이 돌아갈 안식의 고향이다…라고 일컫는 것처럼 말이다.

차치(且置)하고 혹, 상기(上記)한 책자를 못 읽은 이라면 이번 기회에 서점을 서둘러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김종우 기자  safe@119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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