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적으로 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주도하고 있다. 라면, 밀가루 등 식료품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각종 원자재 가격이 올라 생산자물가와 소비자물가가 모두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앞으로도 곡물 수요는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지만, 국내 곡물자급률은 계속 낮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세계 곡물 시장 들썩

2006년부터 서서히 상승 폭을 높여가던 곡물가격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폭등했다. 미국 농무부(USDA)와 농촌경제원 자료에 따르면 옥수수의 단위당 국제 거래가격은 2006년 88달러에서 올해 2월 198달러로 두 배 이상 올랐다. 밀은 142달러에서 398달러, 콩은 214달러에서 487달러로 치솟았다.
지난달에는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중 하나인 카자흐스탄이 밀에 수출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밀 가격이 하루 사이에 22%나 폭등했다. 카자흐스탄 내 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린 조치가 세계 물가를 자극한 것이다. 여기에 이라크와 터키가 밀 비축량을 보충하기 위해 상당량의 밀을 구입하겠다고 나서는 등 공급 부족을 우려한 사재기 양상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2월 26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5월 인도분 밀 가격은 하루 가격상승제한폭인 90센트(8%)까지 오르면서 부셸당 12.145달러를 기록, 2002년 10월 이후 5년여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같은 날 5월 인도분 콩은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부셸당 14.9375달러에 거래됐다. 5월 인도분 옥수수 가격은 전날 부셸당 5.55달러를 기록해 1996년 7월 이후 12년 만에 최고가를 경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상승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 콩 가격이 폭등하자 이에 타격을 입은 인도네시아 식품 회사들은 한때 공장 가동을 중지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지난 1월 5일에는 만여 명의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대대적인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정부의 콩 공급 확대 방안 발표 후에야 가까스로 진정됐다. 이밖에도 멕시코에서는 옥수수의 품귀 현상으로 주식인 또띠야(옥수수로 만든 전병) 가격이 급등하자 국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멕시코 정부에서 옥수수의 가격 상한선까지 설정한 바 있다.  
주요 곡물 생산 국가들의 수출 규제도 심해지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시적으로 보리에 30%, 밀에 10%의 수출세를 부과해 수출을 규제하고 있으며, 수출량이 일정 수준을 초과하면 40%까지 재인상해서라도 자국의 곡물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세계 2위 팜유 수출국인 인도네시아도 팜유 수출세를 10% 인상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지난해 11월부터 한시적으로 밀, 옥수수, 콩 등에 수출한도를 설정해 규제에 나섰고, 아르헨티나, 베트남 등 주요 곡물 수출 국가의 수출 제한 조치가 잇따랐다. 이집트의 경우는 자국의 곡물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쌀의 수출을 전면 중단시키기도 했다.
세계 7위 식량수출국인 중국도 식량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업용이든 식용이든 용도를 불문하고 곡물 수출을 엄격히 규제할 것이며, 특히 대체에너지 개발을 이유로 옥수수 등의 곡물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행위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지난 1월부터 쌀, 옥수수, 밀가루 등에 대해 5~25%의 수출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애그플레이션’ 우려 고조

곡물 가격이 오르면서 식료품 외에도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애그플레이션(Agflation)’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과거에도 자연재해 등으로 곡물 공급량이 줄어들 때면 곡물 파동이 일곤 했지만, 최근의 곡물 가격 상승은 단순한 공급 부족이 아니라 여러 요소의 복합작용 때문이다.

※ 애그플레이션(Agflation) - 애그리컬처(agriculture:농업)와 인플레이션(inflation:물가상승)의 합성어로, 농산물 가격 상승에 따라 관련 식료품을 비롯한 전반적인 물가 상승 압력이 국제적으로 거세지는 현상을 말한다.

곡물 가격 상승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폭발적인 수요 증가다. 중국,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경제 수준 향상으로 인해 곡물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이들 국가의 주식은 잡곡에서 쌀과 밀가루로 교체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흥국의 육류 소비량 증가도 곡물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소고기 1k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8kg의 곡물이 투입돼야 하는데, 중국의 경우 최근 10년 사이에 육류 소비량이 250% 증가해 사료용 곡물 수요가 대폭 확대됐다.  
곡물 수요가 증가한 또 다른 이유는 바이오 연료 분야의 활성화다. 지난 몇 년간 지구온난화와 탄소배출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짐에 따라 바이오 연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바이오 연료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전체 옥수수 생산량의 1/3 가량을 바이오 연료 생산에 투입하고 있다.
반면 곡물 생산량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여서 수급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사막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곡물 재배 면적이 감소하고 있다. 또한 폭설, 폭염,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이 농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호주의 경우 ’05-’06 곡물년도 2,500만 톤이던 곡물 생산량이 기상이변으로 인해 ’06-’07 곡물년도에는 980만 톤으로 급감했다. 이 같은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곡물 생산량 감소세는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됐다.
바이오 연료의 원료가 되는 옥수수의 재배면적이 확대되면서 밀, 대두 등 다른 곡물의 재배 면적이 줄어드는 현상도 식량·사료용 곡물의 공급 부족을 초래한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 곡물 재고량의 절반 수준인 3,000만 톤의 옥수수가 바이오 연료를 생산하는 데 사용됐을 정도다.
’07~’08 곡물년도에도 대부분 농산물의 생산 및 재고량은 감소 추세인 반면, 소비량은 늘고 있어 곡물 가격의 오름세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식량농업기구(FAO)는 주요 농산물의 가격이 ’08~’09 곡물년도 이후에야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08~’09 곡물년도 이후 국제 곡물 가격이 하락한다 해도 ’01~’06 곡물년도에 비해 20~36% 이상 높은 가격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근본적으로 농산물 생산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곡물 가격은 경기 하락과 무관하게 장기 상승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투기성 수요도 곡물 가격 상승의 원인 중 하나다. 미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경제 위기에 빠지자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연방기준금리를 수차례에 걸쳐 총 2.5% 가량 인하하는 등 공격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했고, 달러화 약세로 인해 달러화 표시 자산에 투자됐던 자금이 곡물, 금, 기름 등 원자재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곡물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낮은 금리를 이용한 투기성 자본이 갈수록 증가해 애그플래이션의 장기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더욱이 이런 투기 자본은 연료와 비료 등 곡물의 생산비·물류비를 상승시켰고, 이것이 다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식량 확보 비상, 대책 마련 시급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8%로 OECD국가 중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사료용 곡물을 제외한 곡물자급률도 56.6%(2006년 기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자급률이 100%에 가까운 쌀을 제외하면 식량용 곡물자급률은 5%에 불과하다. 19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UR) 이후 급격히 하락한 식량자급률은 2000년대 들어 평균 27~31% 수준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곡물 가격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비싼 값을 주고라도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수출국들의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곡물 가격 상승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미미한 수준이다. 수출세를 높이고 수출량을 줄이는 등 주요 곡물 수출국들의 수출 제한 조치가 현실로 닥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유무역협정(FTA)의 파고에 맞닥뜨린 국내 농업 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에 삼성경제연구소 김화년 수석연구원은 효율적으로 곡물자급률을 높일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목표 설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우선은 밀, 옥수수, 콩의 자급률이 저조한 상황에서 100%의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는 쌀의 자급기반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타 자유무역협정(FTA)과 다자간의 도하아젠다(DDA)가 타결된 이후에도 식량안보 측면에서 쌀의 생산기반을 유지할 수 있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산량을 확보함과 동시에 생산단가 인하를 위해 경쟁력 있는 농지를 확보하려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국내에서는 농지를 공장이나 서비스 지역으로 개발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앞으로는 식량자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만큼, 농업에 적합한 토지를 충분히 보유해야 이번과 같은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쌀 이외의 곡물자원 중에서는 밀의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견해가 많다. 밀의 경우 자급률을 1% 상승시키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1,539억 원으로, 4,997억 원이 필요한 콩과 1,298억 원이 필요한 옥수수보다 효율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수입단가가 높고 식용으로써의 활용도가 높다는 점도 밀의 생산기반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요인이다.
곡물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 농업자원도 염두에 두고 보다 본격적인 개발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량자원이 부족한 일본의 경우, 연해주에 대두와 채소류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식량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곡물유통을 국가 전략 사업으로 추진, 주요 수출국의 곡물 유통기반시설을 직접 매입하는 방식을 통해 곡물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경우 곡물 가격 상승에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과 중국 등 17개국 농업부문 해외직접투자(FDI)에 8,758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수입물량에 대해서도 30% 정도만 선물시장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과 유통량 변동에 따른 불안전성이 높은 편이다.
지금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애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된다면, 앞으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이미 국제적인 분위기가 ‘식량전쟁’ 체제로 돌아선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곡물 자급률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곡물 수축국의 유통기구와의 선도거래(Forward Contract)를 적절히 활용하는 등 2차적 대안도 고려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생존을 위한 식량 확보 노력이 필요한 때다.
                             

구내형 사회부 기자  safe@119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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