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건강’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건강은 ‘몸짱’이나 ‘S
라인’ 등의 신조어에서 알 수 있듯 지나치게 신체중심적인 경향이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
한 정신이 깃든다고는 하지만 현대인의 정신은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다.
최근 정신질환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정신장애는 더 이상 특정인에 한정시킬 수 없는 범
세계적 질병으로 떠올랐지만 우리나라의 정신보건 수준은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문
제가 되고 있다.
이에 본지는 500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국내 정신질환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짚어보고, 해결
책을 모색하기 위해 정신보건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당신의‘ 정신’은 건강한가

사도세자(1735~1762)가 십대 후반에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이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지만 그 사실을 궐 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절박함이 잘 드러나 있다. 사도세자는 2~3년 후 다시“ 저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어 다만 마음을 어루만지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홍봉한에게 보내 자신의 병세가 심각해진 사실과 그에 따른 고뇌를 표출했다. 궁궐 안에서 마구 칼을 휘두르고 아무 이유 없이 궁녀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반복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세자는 실은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2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도세자’가 정신질환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까?
국내 정신질환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나 기초자료는 없는 상태지만 정신장애자와 알코올리즘
환자를 합치면 대략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정신질환자 수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와 자신의 신병이 노출되는 것을 염려해 정신과 상담·치료를 꺼리는 환자들이 상당수 존재하는점을 감안한다면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가벼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겪는다는 학계 통념으로 본다면, 사실상 전 국민 정신질환자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보건’은 건강한가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분열증, 조울증과 같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약 5천4백만 명에 이르며, 상대적으로 가벼운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1억5천4백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총 2억 이상의 인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특히 개도국에서는 정신질환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의 50% 이상이 지역사회 내의 정신질환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염려했다.

개도국에는 정신보건 자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신질환 환자는 물론, 가족과 간병인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세계보건기구는 “지역사회 정신보건 서비스는 극심한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더욱 접근하기 쉬울 뿐 아니라 정신병원에 비해 정신장애인의 어려움을 돌보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며 각 지역사회에 정신보건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지역사회 정신보건 서비스가 정신병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인권 경시 및 위반 가능성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최근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시설과 정부 지원이 증가하긴 했지만 아직도 정신보건 분야에 있어서는‘ 개도국’ 수준을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전 국민 정신질환자 시대라고 하기엔 사회적 기반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정신질환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구멍 난 의료·보건체계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의 정신장애를 부인하거나 쉬쉬하게 하는 주범이며, 이것은 다시 정신질환자들로 하여금 전문기관의 도움을 회피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 치료를 어렵게 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반면 정신장애를 인정하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비싼 의료비와 신뢰도 낮은 의료서비스, 사회적 차별 등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신질환, 숨바꼭질에 빠져들다

2013년 서울시내 초·중·고교생 2,600여 명과 부모를 대상으로 한 ‘청소년정신건강 역학조사’ 당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학생 비율은 7%였지만, 자녀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부모 비율은 0.8%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중 18%만이 전문상담기관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문기관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복수응답)에 대해서는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모르고(74%)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72%) △가족이 반대하고(70%)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두렵기 때문(70%)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은 물론, 심한 편견까지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교사들이 학생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느껴 학부모와 상담을 할 때에도, 대부분의 학부모가 자녀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겼음을 이해하지 못하며(78%) 정신과에 대한 편견을 보인것으로 나타났다(90%).

2015년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청소년, 학부모, 교사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대한 실태 및 태도 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설문 조사에 응한 학생 중52%가 ‘최근 1년간 정신건강 문제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대답했지만,학부모 중 자녀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35%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 앞의 두 조사 결과는 불과 2년 사이에 청소년의 정신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음을 보여주지만, 달리 생각하면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확대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청소년 집단뿐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현대 정신보건이 한 발짝 전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할 만한 사실은 여전히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의 괴리가 크다는 점이다. 최근 감정 기복이 심해진 김모(18) 양도조울병을 의심해 부모님께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네가그렇게 의지 약한 아이인 줄 몰랐다. 다신 그런 생각 하지 말아라”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정신보건법, 의미를 상실하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정신장애인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거의 전무했다. 1995년 정신
보건법이 제정된 이후 관련 시설과 정부 지원이 증가하긴 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정신장애인은늘어만 갔다. 보건복지부가 정신의료기관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증상 및 기능평가를 실시한 결과에서 이들 가운데 50%가 정상인들과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지만, 정신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지원 정책이 재활및 직업훈련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정신장애인 관련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보건복지부 정신건강팀의 주요 업무는 정신장애인및 정신의료기관 및 요양시설 관리·육성에 치우쳐 있다. 보건복지부 측은 직업재활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정신장애인의 참여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밝혔지만 각 시설에서 어떤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을 통해 일정 수준의 급여를 받게 되면 국민기초생활수급권 자격을 박탈당하도록 한 제도
도 정신장애인의 사회복귀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실제로 한울정신건강센터 최성남 관장이 정신장애인 467명을 대상으로 직업재활 활동에 가장 큰 애로사항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결과, 기초생활수급권 탈락을 염려해 취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1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기초생활수급권 자격을 잃으면 정신의료기관이나 교육기관 등 관련 시설을이용할 때 드는 비용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 중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이 많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진단 검사에 15~30만 원, 1회 상담과 약 처방에 2~10만원 정도가 소요되고, 입원치료의 경우 한 달에 적게는 60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치료비용을 감수하며 사회복귀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현 정신보건법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주는 대신 날개를 꺾어버린‘ 반쪽짜리 흥부’인 셈이다.

정신장애인의 인권 존중해야

보호의무자의 동의와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만으로 강제입원을 가능케 한 현 제도는 ‘정신장애인은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제도가 빈번히 악용된다면 하루빨리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강제입원 기준을 강화하고, 병원이 입원 전·후에 환자의 의사를 보다 존중해야 한다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전화, 외출, 인터넷, 우편 등 환자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병원 측이 임의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이런 점들이 해결된다면 강제입원으로 인한 폐해를 감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정신의료기관의 무차별적 환자 수용을 막기 위해 환자의 신상기록 관리를 보다 철저히해야 한다. 입원 환자들이 병원의 부조리를 외부에 알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관련 기관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 현재 50~100만 원에 불과한 과태료 체계도 강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바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인식을 뽑아버려야 한다. 언제까지나 인력과 예산이 충분치 않다는 핑계로 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정신장애인의 직장복귀 활성화해야

정신장애인의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먼저 단순작업에 집중돼 있는 교육·취업을 개선해야한다. 정신장애가 있다고 해서 전문성을 요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각각의 특성과 소질을 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직무교육을 실시하고, 복귀 작업 분야를 확대한다면 생산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효과적인 직업재활을 위해 정부기관뿐 아니라 지역 내 사회복귀시설, 정신보건시설 등 유관기관 간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 정신장애인이 직업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적응지도와 지속적인 관리, 의료비 지원도 필수적이다.
정신장애인의 직업복귀는 단순한 생산 활동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권리’이며,‘ 치료’의 과정인 동시에‘ 사회적 부담 경감 대책’이다. 때문에 지금의 주먹구구식 직업재활을 개선한다면 추가적인 사회비용 없이도 정신장애인의 사회복귀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형성된다면 보다 건강한 정신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전 국민 정신질환자 시대, 우리의 정신보건이 사회적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현남 기자  safe@119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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