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근성’, 국어사전에 명시된 뜻은 ‘냄비가 빨리 끓고 빨리 식듯이 어떤 일이 있으면 흥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성질’이다. 지난 2003년 정부는 재난 발생시 신속한 대응을 위해 ‘국가통합지휘무선통신망’을 구축하겠다는 정책을 내 놓았지만 4년째 제자리를 걷고 있는 모습에 국민들이 정부를 ‘냄비근성’이라 표하는 것은 결코 과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지난 2003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內洞)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열차는 완전히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녹아 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출근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타고 있어서 인명피해도 엄청나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대형 참사 앞에 정부는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았고 사고지역이 지방인 만큼 많은 정보력을 동원하는 데도 힘에 부쳤다. 사고의 수습이 마무리 지어질 무렵 정부는 앞으로의 대형 참사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국무조정실에 새로운 정책인 ‘국가통합지휘무선통신망(이하 국가통합망)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통보했다. 국가통신망은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그 장점을 인지하고 사용 중이다.

4년째 제자리걸음 중

그러나 문제는 구축 착수 4년이 지나도록 본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등 표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통합망은 경찰과 소방서, 응급의료기관 등 재난 대응 기관이 대형사고 등 비상 상황에서 단일 주파수로 서로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2004년 정부조직개편으로 주무부처가 행정자치부에서 소방방재청 주관으로 변경되면서 국가통합망 구축은 1년여를 표류하다가 2005년 10월 마침내 ‘테트라 TRS 시스템’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테트라(TETRA)는 유럽무선통신표준기구(ETSI)가 정한 디지털 주파수공용통신(TRS:Trunked Radio System) 기술로 유럽형 디지털TRS라고도 불린다. TRS는 주파수 이용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주파수를 다수 가입자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무선통신 시스템이다. 하나의 단말기에서 다수 사용자와 동시에 음성통신을 할 수 있다.
테트라는 아날로그 TRS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개방형 기술로 기술표준화 그룹인 TETRA MoU에서 기술규격을 제정하고 관련 장비 인증 등을 진행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 주요 국가와 중국 등지에서 국가통합망 방식으로 채택했다. 테트라 외 상용화된 다른 디지털 TRS 방식엔 미군 등이 채택하는 아이덴(iDEN:Integrated Digital Enhanced Network) 등이 있다. 테트라의 가장 큰 장점은 단말기 하나에서 음성통신 외에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동전화, 무선데이터전송, 양방향 무선호출 등이 모두 가능하다. 20∼30㎞였던 통화권도 최대 50㎞까지 늘어나며 시속 160㎞ 이상의 고속주행 중에도 통화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통화할 때마다 주파수가 바뀌기 때문에 보안성도 높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10월까지 1차로 서울·경기권 확장사업에 이어 내년부터 민간자본유치(BTL)를 통한 전국망구축에 본격 착수, 오는 2009년까지 완료해야한다.
그러나 2003년 당시 국무조정실은 2006년까지 3천 6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디지털 TRS(주파수 공용통신)방식으로 관련 기관의 무선망을 통합하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통신망이 설치된 지역은 서울, 경기 남부지역과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광역시 일부에 불과하다. 게다가 소방방재청 시범 사업(05′, 10∼06′, 6)과 1차 확장사업시기인 올해 1월부터 9월에는 각각 119억 원, 31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본 사업이 지연되면서 애초 3천 600억 원의 예산은 2천 100억 원으로 줄었고 그나마 집행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사업이 방향을 못 잡는 이유를 정보통신부가 테트라 방식의 디지털 TRS로 표준을 정한 이후에도 기존 TRS망을 사용할지 전국망을 새로 도입할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된 데다 예산 확보 문제, 업체 간 이해관계 등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통신망은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필수 시스템’

이에 소방방재청은 당초 내년을 국가통합망 전국 구축시기로 삼고 올해 말까지 BTL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었지만 현재 사업자 선정은 고사하고 감사원의 최종 감사결과에 따라 사업을 다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현재 국가 통합망 사업은 수감을 마치고 감사원 자체 심의 중으로 빠르면 다음 달쯤 최종 감사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10월 중으로 감사원이 최종 감사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며, “그 결과에 따라 사업을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에서는 최종감사결과에 따라 국가 통합망 구축이 더 늦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문제는 얼마 전 제주지역을 휩쓴 태풍 ‘나리’로 인한 피해모습을 재확인했듯 인재를 줄일 수 있는 필수 시스템인 국가통합망 구축이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는 데에 있다.
매 해 천재지변과 각 종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닌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니 만큼 이번만은 ‘냄비근성’의 모습에서 벗어나길 기대해 본다.

차미경 기자 safe@safe119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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