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전문가 기고 시사옴브즈맨
[라이프] “무덤에는 능, 원, 묘 등이 있다?” 궁금증 10가지
김용옥 기자 | 승인 2020.11.16 10:07
세종대왕릉의 모습

무덤에는 능, 원, 묘 등이 있다. 이 능·원·묘는 왕족과 다른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무덤 명칭이다. 능과 원은 왕족의 무덤인데 그중에서도 왕과 왕위를 계승할 세자, 즉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 그 직계 손(孫)의 무덤이고 그 외 왕족 혈통과 일반인의 무덤을 묘라 하였다.

능(陵)은 일반적으로 왕과 그 비의 무덤을 말한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고, 광릉은 세조와 그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수락산이 있다. 수락산 자락에 선조의 아버지의 무덤인 덕릉이 있는데 이 덕릉은 당시 묘라고 불렸다. 명종이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선조가 뒤를 잇게 되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명종보다 8년 앞서 죽었기 때문에 그 묘는 원(圓)이라고도 불릴 수 없었다. 그런데 선조는 나무 도매상에게 나무꾼이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 후한 값을 주라고 하였고 덕흥대원군묘에서 왔다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곳을 덕릉이라 한다. 선조의 효도심에 비롯되었지만 능은 될 수 없었고 ‘덕원’으로 추존은 가능했을 것이다.

묘(墓)는 기타 빈(嬪), 왕자, 공주, 옹주 등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에 속한다.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무덤을 묘라 하였다. 김유신묘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외에도 장군총·무용총과 능산리고분·안악1호분처럼 ‘총’과 ‘분’ 형태의 무덤도 있다. 총(塚)은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무덤에 있을 경우에 붙인 무덤이고, 분(憤)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점도 없을 때 붙이는 무덤이다. 그러나 굳이 크게 구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Q1 조선 왕릉은 왜 서울과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과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Q2 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조선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Q3 조선왕릉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Q4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 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Q5 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인 셈이다.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Q6 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Q7 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이다.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이다.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Q8 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는 억새 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Q9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낸다.

Q10 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

김용옥 기자  safe@119news.net

<저작권자 © 주식회사 한국안전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용옥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56길 10 (정일빌딩 2층)    대표전화 : 02-762-5557      팩스 : 02-762-5553
신문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50464    발행인 : 최금순    편집인 : 김현남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혜경
보도자료 : safe@119news.net
Copyright © 2020 주식회사 한국안전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